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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 물시계 573년 만에 돌렸다 [중앙일보]
남문현 건국대 교수 `복원 23년` 결실
물통 제자리 찾는 연구만 15년 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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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대 남문현(65.전기공학) 교수는 21일 한복을 차려 입고 서울 세종로 고궁박물관에 나타났다. 조선시대 표준시계인 보루각(報漏閣) 자격루(自擊漏)를 20년이 넘는 연구 끝에 복원해 시연하는 뜻 깊은 자리였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은 이날 남 교수가 이끄는 건국대 산학협력단에 의뢰해 완성한 자격루 복원품을 공개했다. 길이와 높이가 각 6m에 너비가 2m로 박물관 지하 전시실 한 방을 채우는 거대한 규모다.

물이 고였다 떨어지는 과정을 반복하며 쇠구슬을 굴려 인형들이 자동으로 시간을 알리게 한 당시 원리에 따라 복원된 자격루는 이날 오전 11시 작동을 시작했다.


남 교수가 자격루에 처음 관심을 가진 것은 1984년, 미국 버클리대 지도교수의 권유 때문이었다. "자동제어장치 전공자라면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제어장치에 관심 가질 만하지 않나요"라고 그는 되물었다.

문헌 자료는 '세종실록' 65권 보루각기. 하지만 설계도도 없는 2000자짜리 문서만으로 원리를 파악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표현도 모호했다. 자동 시보장치를 움직이는 두 가지 구슬의 규격이 중요한데 문헌엔 그저 "작은 것은 탄알만 하고 큰 구슬은 계란만 하다"고만 적혀 있었다.

그래서 남 교수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토종닭의 달걀 크기 측정이었다. 또 당대의 물시계들을 보러 중국.일본 등지로 숱하게 다녔다.

그가 모델로 삼은 것은 덕수궁에 있는 자격루. 세종 16년(1434) 장영실이 만든 것을 중종 31년(1536) 개량한 것이다. 현재 물받이 원통과 물통만 남아 있다. 창경궁에 있던 것을 1911년 무렵 일본인 학자들이 덕수궁으로 옮기면서 배열이 엉망이 됐다. 이 물통의 제자리를 찾는 연구에만 15년이 걸렸다.

"알고 있는 현대적 원리의 회로를 지우고, 거꾸로 더듬어 올라가면서 옛날 방식의 기계 논리를 체득했습니다."

97년이 돼서야 문화재청과 함께 본격적인 복원 설계 작업이 시작됐다.

 2004년 12월부터 1년간 제작에 들어갔다. 전통 단청장, 유기장, 옻칠장 등 무형문화재급 장인과 기계공학자 등 '선수' 32명으로 팀을 꾸렸다. 10여 년간 연구한 설계도는 재현 과정에서 무수히 변경됐다. 이렇게 해서 2005년 12월, 자격루 1차 복원에 성공했다.

남은 것은 정밀도를 높이는 일. 물시계가 정확히 작동하려면 물 관리가 필수다. 조선시대에도 자격루 옆에 난방장치를 뒀을 정도로 항온 항습에 주의했다.

내년 2월 정년 퇴임하는 노학자의 집념은 그침이 없다.

"이번에 복원한 보루각 자격루 외에 자격루는 하나 더 있었습니다. 흠경각 자격루입니다. 이 복원도 끝나야 비로소 자격루를 완전히 복원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격루(自擊漏)=물이 고이는 양으로 시간을 측정하는 물시계는 삼국시대부터 나라의 표준 시계로 사용됐다. 세종 16년(1434) 장영실은 여기서 더 나아가 아라비아식 자동 시보장치를 물시계와 결합한 보루각 자격루를 만들었다.

쥐.소 등 12지신상이 두 시간마다 창 밖으로 나와 시간을 알린다. 밤에는 또 다른 인형이 나와 북과 징을 울렸다. 장영실의 자격루는 임진왜란 때 소실됐으며, 현재 남아 있는 자격루(국보 제 229호)의 일부분은 중종 31년(1536) 설치돼 1895년까지 표준시계로 사용되던 것이다.


권근영 기자 , 사진=김태성 기자


“최첨단 기술로도 23년 걸렸다”…자격루 복원한 남문현교수
입력: 2007년 11월 21일 18:37:50
 

“꼭 23년 걸렸군요. 감회가 새롭습니다.”

1984년이었다. 자동제어가 전공인 남문현 건국대 교수(65)는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자동제어 기술이 당연히 있을 줄 믿고 ‘스스로 자(自)자’가 들어간 기록과 유물에 관심을 가졌다.

가장 눈에 띈 것은 자격루(自擊漏)였다. 남문현 교수는 그때부터 1434년 조선 세종의 지시로 장영실이 발명한 자격루 복원에 매진했고 만든 지 573년 만인 20일, 완전복원에 성공했다.

 자격루는 물시계이면서 자동시보장치를 갖춘 표준시계. 한국과학사의 위대한 발명품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자격루의 기본원리는 동아시아 전통의 유압식 물시계와 크고 작은 구슬을 이용한 아라비아식의 자격장치가 조합된 시스템이에요.

장영실은 중국 및 아라비아 시계 기술을 접목, 아날로그와 디지털 변환기로 접속되는 사이버 시스템을 발명한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나라 최초의 디지털 시계였던 셈이죠.”

하지만 장영실의 자격루는 소실됐고, 현존하는 자격루(국보 229호)는 1536년에 다시 만든 것이다. 그것도 1만원권에 도안된 자격루는 물항아리 등 일부 부품뿐이다.

“문헌에 나타난 기록을 토대로 철저한 고증작업을 펼쳤는데, 이번 복원작업에 모두 30여명의 내로라하는 학자 및 장인들과 최첨단 기술이 총동원됐어요.

 그러니 570여년 전인 조선초의 과학기술이 얼마나 빼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지요.”

자격루는 물시계(아날로그)의 물의 흐름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다시 일정한 시차로 구슬과 인형을 건드려 자격장치(디지털)를 작동하도록 설계됐다.

조선초에 이미 빼어난 자동제어시스템을 구축한 것인데, 만약 쇠구슬의 크기가 1㎜만 달라도 제대로 된 시간을 측정할 수 없다.

“지금까지 현전했던 자격루의 물시계 항아리 배열방식이 일본학자들에 의해 크게 잘못됐는데, 이번 복원과정에서 바로잡았습니다. 대파수호-중파수호-소파수호 순(1열3단)으로….”

자격루에는 백성을 끔찍하게 여겼던 세종의 경천애민사상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세종은 시각을 알리는 사람이 잘못 알리면 중벌을 면치 못하니 장영실에게 명하여 시각을 알리는 일을 맡길 시보인형을 나무로 만들었으니…사람의 힘이 들지 않았다”(세종실록 보루각기)는 기록에서 임금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에 따라 자격루는 12지시(十二支時·2시간)마다 종이 한번씩 울리면서 동시에 그 시에 해당하는 십이지신 인형이 시간을 알리고(시기·時機), 밤(오후 7시부터 새벽 3시 무렵)까지는 북과 징을 울리도록(경점시보기구) 설계됐다.


자격루의 시보신호는 광화문을 거쳐 운종가 종루로 전해져서 인정과 파루시각을 알리는 데 사용됐다.

 남교수는 “자동시보인형이 주는 신비감과 경외감 또한 대단했을 것”이라면서 “신묘한 재주를 지닌 왕실이라는 관념도 심어주었으니 통치의 도구로도 활용된 셈”이라고 전했다.

〈글 이기환 선임기자·사진 박재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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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무명초 :
《“정조는 음악적 재능과 식견에서 세종을 능가한 군주였습니다.” 조선 후기 음악사를 개척해 온 송지원(사진)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최근 ‘정조의 음악정책’(태학사)을 펴냈다. 서울대 국악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1992∼97년 KBS 국악 프로그램 작가와 진행자로 활약했던 그가 학계로 돌아간 뒤 내놓은 첫 단행본이다.》

2002년부터 계간 ‘문헌과 해석’에서 우리 역사 음악가들의 사연을 발굴해 맛깔 난 글 솜씨로 소개한 ‘음악가 이야기’의 필자로 그를 기억하는 사람에겐 의외로 딱딱한 이론서지만 그 내공은 만만치 않다.


그는 이 책에서 TV 드라마 ‘이산’에서 문무겸전의 멋쟁이로 나오는 정조가 음악적 재능에 있어서도 세종을 능가한 조선조 최고의 악왕()이었다고 주장했다.

세종은 한국 전통의 제례악인 향악(), 삼국시대 이후 중국의 제례악인 당악(), 중국 고대 제례악인 아악()의 악보와 악기 악곡을 정리하고 악서()를 편찬했다. 또한 박연을 시켜 음률을 통일하고 편경과 편종 등을 새로 제조케 했는가 하면 새로운 악보로서 정간보 등을 창안했다. 이 때문에 세종에 비견될 조선조 왕을 찾기 어려웠다.

그러나 송 연구원은 이런 통념을 깨고 “정조가 이룬 음악 업적은 양과 질에서 세종을 뛰어넘는다”며 “세종이 문물정비기 왕으로서 독창성을 발휘했다면 정조는 문물완비기의 왕답게 유교 예악정치의 완성을 꿈꿨다”고 말했다. 쉽게 말해 세종이 모차르트였다면 정조는 베토벤이었던 셈이다.

세종에게 박연이 있었다면 정조에겐 서명응이 있었다. 정조는 세자 때 스승이었던 서명응을 특별히 발탁해 음악 이론서로서 ‘시악화성’과 ‘시악묘계’ 그리고 국가전례 전반에 쓰이는 악장 모음집인 ‘국조시악’ 등을 편찬케 하고 직접 그 서문을 썼다.


정조는 자신의 문집인 ‘홍재전서’에 실린 ‘악통’을 직접 썼다. 또한 그는 ‘춘관통고’와 같은 대규모 국가전례서에서 ‘예로써 다스리고 악으로써 조화를 꾀한다’는 예악사상을 새롭게 고취했는가 하면 규장각에서 자신이 직접 육성한 ‘초계문신’을 ‘지악지신()’으로 키우기 위해 특히 악론()을 강조했다.

정조는 비단 이론에만 밝았던 것이 아니었다. 세종이 악공들도 구별하지 못하는 음의 오차를 집어낼 정도의 절대음감을 가졌다면 정조는 궐내 악공과 악생을 전원 소집해 개별 연주와 합주 때 문제점을 일일이 집어내는 ‘카리스마의 음감’을 과시했다.

송 연구원은 이런 정조가 문체반정()에 버금가는 악풍반정()을 펼쳤다고 주장했다. 문체반정은 정조가 고답적 한문 문체를 벗어나 개성을 추구한 박지원과 이옥 등의 문체를 잡문()이라 비판하며 순정고문()으로의 회복을 주창한 것을 말한다.

송 연구원은 정조가 예악정치의 이상이 조선에서 실현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로 예에 비해 악의 조화가 무너졌다는 인식 아래 빠른 음악을 선호하는 당시 사람들의 음악 성향을 거부하고 완만한 고악()의 회복을 기도했다는 점에서 이를 ‘악풍반정’이라 이름 붙였다.

“오늘날의 관점에선 문체반정이나 악풍반정이 모두 개성을 억누르는 반동적 행태로 비치지만 최고 통치자의 관점에선 엄청난 변화의 흐름 속에서 중심을 잡기 위한 안간힘이 아니었을까요. 다양한 부분이 조화를 이루는 음악처럼 예악정치의 실현을 꿈꾸는 통치자와 자신의 음악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천민 출신의 악공들이 어우러져 당대의 역사가 빚어진다고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권재현 기자 <U>confetti@donga.com</U>


Posted by 무명초 :

1739년(영조 15) 관서 암행어사 이성효가 삭주부사 이만유의 불법을 캐낸 후 창고를 봉하려 할 때였다. 믿는 구석이 있었는지 이만유가 칼을 뽑아들고 이성효에게 달려들었다.
"길거리에서 밤을 타고 들어온 자는 필시 가짜 어사일 것이니, 내가 단칼에 너를 죽이리라."
목숨이 위태로워진 어사 이성효는 곧바로 마루 위로 올라가 품안의 마패를 꺼내들었다. 그러나 이만유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것을 믿을 수 없다!"
그러나 분명 암행어사 마패였으므로 이만유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네가 이 물건이 무엇인지 아느냐? 이것을 보고 마음대로 해보아라."
이성효의 추상같은 외침에 이만유는 그만 황망하여 바닥에 엎드리고 말았다.


1795년(정조 19) 호남 암행어사 이희갑이 출도를 하지 않고 돌아온 일이 있었다. 이 때 왕이 크게 노했다.
"암행어사가 출도를 하지 않은 채 남몰래 갔다가 남몰래 돌아왔다는 것은 듣지 못했다. 시체가 구렁에 뒹굴고 있는 것을 눈으로 보고도 출도를 하지 않은 탓에 또 다시 새롭게 조사를 벌이는 일이 있게까지 했다. 물론 임무가 생소한 탓도 있겠으나, 경솔하게 행동했다고 하겠다. 처음과 두 번째 올린 계사의 체례도 모두 착오를 범했는데, 그 잘못된 것이 임금의 명만 욕되게 했다고 말할 수 없다. 어사 이희갑의 이후 관직 진출을 막도록 하라."
(정조 실록 19년 5월 22일)


1763년(영조 39) 3월 3일에 호남 암행어사 홍양한이 전라도로 떠났다. 4월 9일 태인현에 도착해 쌀 1천 석 불법 사실을 알았고, 출도 직전에 점심을 먹다가 갑자기 사망했다. 이 때 사람들은 그가 독살된 것이라고 의심했다. 대사간 한사직이 4월 23일 어사 홍양한의 사인을 밝힐 것을 다음과 같이 요청했다.
"며칠 전에 어사 홍양한이 태인현에 당도하여 아전이 사사로이 관청의 재물을 사용한 것이 많게는 수천 석이라는 말을 듣고 여러 방면으로 조사하여 출두하고 죄를 다스리려고 하던 즈음 점심밥을 먹고 갑자기 죽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의심하고 전해지는 말이 낭자합니다. 청컨데 형조에 지시하시어 어사를 데리고 간 서리를 잡아 가두어 신문케 하고, 태인의 객점 주인도 엄하게 문초하소서."
왕이 이 말을 옳게 여기고 형조에 서리와 어사를 대동한 수졸들을 심문하게 했다. 그랬더니 '어사는 단지 국밥 몇 수저 먹었을 뿐이고 나머지는 수졸이 먹었습니다'고 했다. 이에 왕이 모두 풀어주었다.
그런데 홍양한이 호남 암행어사로 객점에서 죽을 때 겸인 김석준이 곁에 있었다는 말을 듣고, 홍양한의 아들 홍낙교가 김석준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음을 의심하며 사헌부에 고소했다. 그러나 끝내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는데 이 때 영조는 "김석준이 홍양한의 죽음을 보고도 버리고 먼저 돌아온 것은 죄를 줄만 하다"며 김석준을 귀양보냈다.


1774(영조 50) 제주 암행어사 홍상성은 제주로 내려가던 도중 기생을 사귀게 되었는데, 제주에까지 기생을 데리고 갔다. 이에 대사간 임희중이 왕에게 고하기를
"제주 어사 홍상성이 길에 만난 기생과 함께 배를 탔습니다. 어사의 신분에서 더욱 엄격하고 삼가야 하는데, 이런 일은 일찍이 들어본 적 없습니다. 청컨데 관직을 삭탈하소서."
왕은 홍상성의 이름을 서종안에서 삭제하고, 해남편으로 귀양보냈다. 그런데 한 달 반이 넘도록 홍상성이 제주를 떠나지 않았다. 마침 제주 사람이 올라왔기에 어사가 바다를 건넜는지 물었더니 기생을 데리고 아직 제주에 머물러 있다고 대답했다. 이에 대사헌 송형중과 대사간 박사해 등이 아뢰기를
"홍상성이 기생을 데리고 바다를 건너간 것은 고금에 없던 해괴한 일이므로 마땅히 처분을 기다려야 할 것인데, 아직도 기생과 지내고 있다고 하니 방자하고 거리낌 없음이 이보다 더할 수 없습니다. 청컨데 엄중히 추국하소서."
(영조 실록 50년 12월 7일)
화가 난 영조는 제주 어사 홍상성을 급히 잡아오도록 명했고, 홍상성은 국문을 당한 후 변방으로 쫓겨났다.


1781년(정조 5) 관서 암행어사 유의는 임무 수행 중 여러 차례 서계를 올렸는데, 그 내용이 매우 엉망이었다. 이에 정조는 그의 보고서 내용이 부실했음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사신이 왕명을 받들면서 어느 것인들 중요하지 않겠는가마는 암행어사는 더욱 각별하다. 그러므로 반드시 근엄하게 하고, 정밀하게 해야 조정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런데 어사 유의의 서계를 보면 아뢴 것이 모두 일곱 번이나, 조리가 없어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수령의 치적에 대한 것은 어불성설이고, 곡포에 관한 내용도 엉망이다. 보고 형식이 격식에 어긋나고 혼란스러우니 어찌 암행어사를 파견한 본 뜻이 이루어지겠는가.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죄를 면하기 어려우니 해당 어사를 처벌토록 하라." (정조 실록 5년 1월 11일)
그런데 조사 결과 유의의 부실한 보고서는 직무를 열심히 수행하려다가 잘못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정조는 유의의 직첩을 돌려주고, 실록청의 낭관으로 임명했다. 몇 달 후 영조 실록이 완성되었는데, 이 때 유의는 가자의 은전을 입었고, 그 후 홍주목사로 승진되었다.


정조 치세 때, 경상우도 암행어사 이서구가 상주 목사 심기태의 불법행위를 적발해 처벌했다. 그런데 경상 감사 이조원이 이 사건과 관련해 암행어사에게 진술한 사람을 가두고 문초했다. 이에 사헌부 장령 최경악이 이조원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에 의하면 이조원이 어사에게 사실을 말한 자들을 옥에 가두고 보복했다고 한다. 이 보고를 들은 정조는 이조원을 철처하게 조사하라고 명했다.


1793년(정조 17) 호서 암행어사 윤노동이 해당 감찰 지역 외 다른 지역을 탐문하고, 더욱이 종적을 비밀로 하라는 규정까지 어기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같은 호서 암행어사들은 서로를 가짜라고 싸움이 일어나게 되었고, 윤노동은 파직되었다. 또 암행어사 이조원은 자신의 지역이 아닌 다른 지역을 탐문했다가 처벌을 받게 되었다. 이 일에 대한 정조의 처사는 다음과 같았다.
"어사에게 내리는 봉서는 그 자체가 지극히 엄중한 것이다. 만약 내려가는 도중 근처 고을을 탐색하라는 말이 없으면 타지역 수령들을 감히 논박할 수 없는데, 이번 어사들의 행사에서 이조원이 봉서를 잘못 보았다는 말은 지극히 소홀한 처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윤노동도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 담당 이외의 고을을 감히 제 마음대로 선택하여 산간이나 연해 고을을 광범위하게 다녔고, 심지어는 다른 어사가 이미 출도한 지역까지 들어갔으니 받든 사명을 크게 그르쳤다고 하겠다. 더구나 종적을 숨기고 다녀야 하는 신분으로 관첩에 서명까지 하여 보낸 것은 예전에 듣지 못한 일이다. 여러가지 일들이 경솔했으니 이후 관직 진출을 막도록 한다." (정조 실록 17년 6월 13일)


위에 이어 이조원 이야기 계속 ...


이조원이 말하기를
"신이 돌아오는 길에 신창에 들렀는데, 어떤 사람이 신의 행색을 엿보고 빠른 걸음으로 뒤를 밟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에 저는 재종형 이홍원의 온양 임지로 가서 그들의 동정을 살폈습니다. 그런데 조금 뒤 홍주 진영의 건장한 장교와 사나운 졸개 10명이 그곳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신의 재종형이 찾아온 연유를 물으니, 장교가 은밀하게 말하기를 '홍주 영장이 가짜 어사이니 속히 잡아오라 했다. 그 자가 아까 이곳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으니 체포해야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신의 재종형이 말하기를 '그는 나의 친족이고, 가짜 어사가 아니니 속히 물러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홍주 진영의 장교가 계속 감시하며 저를 체포하려 했습니다. 일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사태를 파악하기 어려워 그 자리에서 출도하여 장교를 붙잡고 홍주 영장에게 공문을 보내 이리로 오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오후에 갑자기 아산의 장교 30명이 본군에 들이닥쳐 말하기를 '어사가 해당 고을에 출도하여 우리들을 내보내면서 온양에 출도한 가짜 어사를 잡아오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신은 더욱 놀랐고, 또 생각해 보니 아산에 출도한 어사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별하기가 어려웠고, 혹시라도 간악한 백성이 이런 일을 저질러놓고 종적이 탄로날까 두려워서 일부러 아전과 장교를 흩어지게 해놓고 그들이 비운 사이 틈타 도망치려는 것인가 하는 염려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를 만나 따져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습니다.

이후 신이 그곳으로 가보니 그쪽에서도 이곳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도중에 말을 세우고 촛불을 비추어 보니 서로 명을 받들었던 사람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신의 처사가 경솔했음을 책망하니, 그가 말하기를 '혼자 이곳을 모두 담당한 것으로 알았기에 출도한 사람이 가짜라고 의심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미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고 의심을 풀었으므로 말을 돌려 되돌아왔는데, 홍주 영장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꾸짖었더니 겁을 먹고 꾸며대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신이 그 때에 만일 길에서 서로 만났더라면 봉변을 면치 못했을 것인데, 다행히 왕명을 욕되게 하는 일은 면했습니다. 그러나 해당 영장이 경솔하게 일을 저지른 것은 잘못된 일이니 홍주 영장 이현택을 처벌하소서." (정조 실록 17년 5월 27일)
이에 정조는 이조원을 가짜 어사로 오인한 홍주 영장 이현택의 관직을 삭탈하고, 아산 현감 윤광심도 심문하도록 했다.

1727년(영조 3) 박문수가 처음 암행어사로 천거되었다. 이 때 호남과 영남에 흉년이 들어 급히 어사를 파견하려 했는데, 박문수가 천거되자, 영조는 나이가 젊고, 수령을 역임한 적이 없다며(영조는 어사가 수령에게 휘둘리는 폐해를 막기 위해 수령을 거친 자를 어사로 삼았다고 함) 반대했다. 그러나 좌의정 조태억은 '박문수는 사리에 두루 통달하고 시무에 밝다'며 거듭 추천했다고 한다.


정약용은 1794년(정조 18) 경기도 적성, 마전, 연천, 삭녕의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그는 정조의 명을 받아 일을 마친 후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전 연천 현감 김양직은 마음대로 환곡을 나누어 주고, 재결을 도둑질해 먹었으니 그 죄를 유사에게 조사시켜야겠습니다. 전 삭녕 군수 강명길은 화전에 지나치게 세를 물리고 향임들에게 뇌물을 받았으니 비록 체차되어 옮긴 지 오래되었으나 죄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조 실록 18년 11월 16일)
정약용의 보고서는 좌의정 김이소에 의해 보고되었고, 정조는 즉각 관련자들을 처벌했다.
정약용과 함께 암행어사로 파견된 사람은 박윤수, 홍낙유, 정내백, 채홍원, 정이수, 유사모, 이조원, 정동관, 조석중, 서준보, 구득로, 정문시 등 13명이 더 있었다. 정조는 각 암행어사에게 다음과 같은 유시를 내렸다.

"수령의 잘잘못을 규찰하고 백성의 괴로움을 살피는 것이 어사의 직임이다. 어사가 비단옷을 입는 것은 그 은총을 드러내는 것이요, 도끼를 지니는 것은 그 권위를 높이려는 것이다. 근래 각 도에 보낸 사람들이 그 직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다는데 어찌 그 사람들만을 책망할 수 있겠는가. 조정이 사람을 제대로 뽑지 못한 것에도 책임이 있다. 만약 그들이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하여 파견하지 않는다면 내가 구중궁궐에서 어떻게 민정을 살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천 리나 되는 경기 지방에 흉년이 든 것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너희들은 맡은 바 직분을 삼가 관부와 시장, 촌락을 드나들며 세세히 조사해 조정에 돌아올 때에 일일이 조목별로 나열해 올리도록 하라. 도장과 장부를 혀장에서 잡은 경우가 아니면 혹시라도 경솔하게 먼저 창고를 봉하지 말라." (정조 실록 18년 11월 16일)

Posted by 무명초 :